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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는 시를 쓰며 살아갈 수 있을까 --- 이창동 '시'



★★★★★

우리는 시를 쓰며 살아갈 수 있을까 --- 이창동의 '시'





(스포일러 포함)


우리는
영화 속 대사처럼 시가 죽은 시대가 아니라, 시를 쓰려고 하는 마음이 죽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름과는 정반대로 비루한 현실을 살아가는 미자에게
시는 한줄기 빛과 같은 '어떤 것'이다.
하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서 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자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미자의 손자는 집단 성폭행에 가담을 하고 피해자 여학생은 자살을 한다.
미자는 손자에게 기회를 준다. 네가 행한 죄를 뉘우쳐라. 피해자 사진까지 식탁에 놓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손자는 털끌만한 죄의식 조차 없다.
tv오락프로를 보며 낄낄거리고 피해자 여학생의 사진을 보면서 아무 일이 없었던듯 밥도 잘 먹는다.
미자는 이런 손자를 지켜볼 뿐이다.




( 가운데 학교 교장으로 나오는 사람이 최문순 의원이다.)


가해자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들 장래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피해자 엄마와 돈으로 합의를 하려고 하고,
학교는 소문나는 게 두려워 사건을 은폐하려 하고, 언론은 등쳐먹고...
미자는 이런 현실에서 튕겨나가 시를 쓰려고 애쓰지만 시상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미자의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은 3살때의 기억이다.
다른 이들의 행복한 순간은 불륜이지만 사랑했을때,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다가 임대아파트를 분양받았을 때,
등등 최근형 혹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이 불쌍한 미자, 고작 행복했던 기억이 3살 때이다. 그래서 이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단지 미자의 꿈일 뿐이다. 미자는 한순간도 행복했던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미자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발표하면서 서럽게 운다.

미자는 이 영화에서 많이 운다.
이 고단한 현실에서 고작 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것뿐이 없다.










미자는 병든 노인에게 몸을 팔아 손자의 합의금을 마련한다.
시상이 떠오를 때 마다 적는 메모장에 협박성 글을 써서 돈을 받아낸다.
미자는 이제 더 이상 아름다운 시를 쓸 수가 없다.



영화 시작에서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여학생의 엄마는 신발도 신지않고 딸의 죽음을 절규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가해자들 부모가 건네준 돈으로 딸의 죽음을 '합의'한다.
이 현장을 지켜보던 미자는 묻는다.
이렇게 다 끝나면 되는 건가요?




미자는 손자를 경찰에 고발하고 사건을 파국으로 만든다.
미자의 선택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는가.
현실은 영화 속 강물처럼 그저 흘러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하늘이 알고 있는, 이 죄를 어찌 할 것인가.
미자는 아네스(피해자 여학생의 세례명)를 위한 시를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이 죄를 씻고자 했지만
우린 아무런 일도 없는듯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하는 가를 묻는 이 영화에
나도 미자처럼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